언론보도

[2017.06.02] 열등감에 빠진 19세기 동유럽 ‘고대 영광’에 집착하다

[4인의 서재] 임지현의 글로벌

지난해 11월 이준식 부총리,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 등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올바른' 역사교과서 현장 검토본을 공개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반도의 식자층들에게 세계사에 대한 관심이 가장 높았던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지구화 시대인 지금이라는 답이 많이 나올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 답은 ‘땡’이다. 1890년대 갑오개혁 시기부터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1910년까지 20여 년 간 세계 역사에 기울였던 구한말의 관심에 비하면, 여전히 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쟁에 매달려 있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역사의식은 답답하기 짝이 없다.

구한말에 출간된 세계사 목록을 보면,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다채롭다. ‘나파륜전’이라는 이름의 나폴레옹 전기나 ‘영국사요’ ‘법국혁신전사’ ‘미국독립사’ ‘법란서신사’ 등 서유럽의 역사서들도 물론 적지 않지만, ‘피득태제전’이라는 러시아의 피터 대제 전기를 비롯해 ‘파란말년전사’ ‘애급근세사’ ‘월남망국사’ ‘이태리건국삼걸전’ ‘흉가리애국자갈소사전’ 등 러시아, 폴란드, 이집트, 베트남, 이탈리아, 헝가리 등 비서구 역사를 다룬 책들이 자주 눈에 띈다. 스위스 건국 영웅 빌헬름 텔을 다룬 쉴러의 역사소설도 나란히 번역되어 이채롭다.

20세기 초 애국주의 세계사의 광풍

비서구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고 해서, 이 책들이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동유럽과 아시아ㆍ아프리카의 비서구 국가들은 왜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처럼 근대적이며 부강한 민족국가를 만들지 못하고 몰락하여 서구의 식민지로 전락했는가를 밝혀서, 식민지로 전락할 국가적 위기에 빠진 대한제국을 구해낼 방책을 찾아야겠다는 문제의식이 그 밑에는 깔려 있다.

‘애국주의적 세계사’라 할 수 있는 이 책들은 결국 서유럽의 근대를 역사발전의 모델로 삼는 결과론적 서구중심주의의 서사구조를 안고 있다. 구한말 한반도 독자들의 관점에서는 세계사지만, 이 책들의 원저자들이 쓴 것은 자기 나라의 ‘국사’였다. 19세기 중반 폴란드, 리투아니아,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의 ‘국사’를 만든 애국주의 역사가들을 다룬 ‘역사가들과 민족주의(Historian and Nationalism’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예수는 크로아티아 사람이고

12사도는 세르비아인이라니

국정교과서 만들겠다는

낡은 상투성과 무슨 차이 있을까

Monika Baár

Historians and Nationalism: East-Central Europe in the Nineteenth Centu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ㆍ2010

이 책의 저자인 모니카 바르는 영어 독어 불어는 물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5개국의 언어에 능통한 헝가리 출신의 젊은 여성 역사가이다. 헝가리에서 대학교육까지 받았기에 저자는 동유럽 민족주의와 ‘국사’의 공모관계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좋은 위치를 가진 셈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책은 동유럽 5개국의 ‘신채호’ 혹은 ‘박은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광의 고대사, 19세기 동유럽에서도 흔했다

이들은 강한 애국심과 부족한 자료, 그리고 과거를 낭만적으로 이상화하는 당대 역사서술의 특징을 공통적으로 안고 있다. 19세기 그들의 조국이 처한 정치적 불행 때문에 이들의 관심은 역설적으로 위대한 과거로 향했고, 역사 연구는 자기 조국을 외국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로 이끄는 도구였을 뿐이다. 민족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는 또한 봉건제를 철폐하고 시민적 자유를 증대시키는 등의 근대적인 개혁과 맞물렸다.

이들에게 역사 쓰기는 정치적 실천의 일부였고, 정치 참여는 과거를 이해하는 걸림돌이기는커녕 진정한 역사적 통찰을 위한 촉매제였다.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역사 연구는 사실상 동유럽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프로이센의 역사가 하인리히 지벨은 자신의 60%가 정치가이고 40%는 역사가임을 숨기지 않았다. 프랑스의 역사가 프랑소아 기조가 제3공화국의 총리였다는 사실은 너무 명백해서 사람들이 자주 잊어버릴 정도이다.

그래도 동유럽 ‘후진’ 국가들의 국사는 어딘지 다르다. 서유럽 각국의 국사가 근대적 민족국가 발전의 ‘보편적 모델’을 서술하고 있다면, 동유럽 국가들의 국사는 항상 ‘후진’적이거나 ‘일탈’의 역사이고 독재와 파시즘, 반봉건의 ‘특수한 길’로 서술된다. 어떻게 하면 서유럽 국가들처럼 부강하고 근대적인 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이 거꾸로 서유럽과의 차이를 부각시키고 결과적으로 지울 수 없는 열등감으로 가득 찬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서유럽에 대한 열등감에 가득찬 역사

‘고대의 영광’에 대한 집착은 그러한 열등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예수는 크로아티아 사람이 되고, 12사도는 세르비아인의 선조, 아담은 헝가리의 선조가 되는 것이다. 공자가 ‘동이족’으로 ‘한국사람’이었다거나 북경이 ‘우리의 옛 땅’이라는 식의 주장들은 실상 19세기 동유럽의 역사서술에서는 흔한 주장들이었다.

자신들이 만들고자 하는 국민국가의 영역 내에 타민족의 역사적 흔적이 있으면 큰 사단이 난다고 생각하는 식의 ‘영토순결주의’도 19세기 동유럽의 역사서술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한 세기 전 동유럽의 국사 서술에서 한사군의 영역을 압록강 밖의 만주로 밀어내고자 하는 식의 우국충정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우국충정의 밑에는 부국강병의 근대국가를 선망하는 주변부 민족주의자들의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달 31일 정부세종청사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 직원이 사무실 명패를 내리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 작업에 앞장선 추진단은 이날 해산됐다. 연합뉴스

국정 역사교과서는 가장 강력한 블랙리스트

국사편찬위원회가 이름을 바꾼다는 기사를 막 접하고 나니, 19세기 동유럽의 국사에 대한 이 책에 생각이 미쳤다. 이제는 일본에서도 쓰지 않는 ‘국사’라는 일본 제국주의 역사학의 잔재를 떨어내 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권력이 ‘정사’를 편찬한다는 낡은 상투성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다. 국정교과서는 국가가 공인한 것과 다른 역사해석은 전부 블랙리스트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공격적인 블랙리스트인 것이다.

서강대 교수


기사 원문: http://www.hankookilbo.com/v/09bc05e7d0d145c0a405ecd37c0092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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